기독교인인 조성자 시인의 신문사설인데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씽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여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중략)/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 뿌리가 내벽엔/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박후기 시인의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부분-
희망과 절망은 한 태에서 나온 일란성 쌍생아라는 생각을 해본다.
쌍둥이라도 엄연히 위아래가 있는 법. 희망은 형이고 절망이 동생이다. 대체로 희망이 절망을 보듬어 안을 줄 아는 걸 보면 알겠다. 그렇다 해도 둘은 막상막하인 것 같다.
희망 속에 절망이 복병처럼 숨어있기도 하고 절망 속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모든 희망은 약간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고 절망도 엄살을 심하게 떤다. 그래서 절망과 희망의 거리가 엄청 먼 듯 보이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거기서 거기다.
희망이 겁내는 절망도 속을 알고 보면 한 방에 날려 보낼 만큼 시시한 것이 대부분이고, 절망이 견제하는 희망도 자세히 보면 나약한 구석이 있다. 둘 다 마음의 과단성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마음의 수하들이다.
나는 희망이 좋다.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여전히 희망 쪽에 기대고 있음을 본다. 지난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무겁게 가라앉던 마음이 훨씬 밝게 새해를 시작하고 있다.
흑뱀의 해라던가. 뭔가 올해는 다를 것 같고, 뭔가 기대해도 좋을 것 같고, 하나님이 내 손을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으로 새해는 밝았다.
일월은 한 해의 첫 달. 이쯤에서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꼭 힘으로만 승부가 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아온 경험으로 안다. 아무리 큰 상대라고 해도 눈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물매로 골리앗을 이긴 다윗처럼 예상을 뒤엎을 수도 있다.
나도 당신도 조금은 겁이 나고 조금은 주저하게 되지만 우리에겐 희망도 절망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의 과단성이 충분히 있으므로.
시바타 도요는 99세의 나이로 시집을 출간해 70만부가 팔려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일본 할머니 시인이다. 90세가 지나서 글쓰기를 시작해 굴곡진 인생역정을 긍정적 힘에 기대 시를 써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냈다.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약해지지 마'라는 구절은 한동안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다. 세상을 향한 왕성한 호기심이 장수의 비결이기도 하다는 이 할머니의 인생이야말로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들기는 희망이라는 유전자 때문 아닌가 싶다.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야말로 강력한 희망무기이다. 새로운 것,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운 이들에게 절망은 발붙일 곳이 없다. 그곳이 땅이든 하늘이든, 꿈이든 미래이든, 그곳을 향한 열망으로 끊임없이 내적 충전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이 희망의 극치 아니고 무엇인가.
희망만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희망은 큰 위력이 없다고 한다.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 본 자에게 희망은 천둥 같은 위력을 지닌다고 한다.
우리가 설령 절망에게 볼모 잡혀 불안한 좌절의 나날을 보냈다 할지라도 겁내지 말자. 우리에겐 희망의 유전자가 하나 있으므로 기필코 희망의 강펀치를 날려 절망을 넉 다운 시킬 수 있을 테니까.
조성자 시인